자아와 우주의 근원을 찾아가기

이상복의 회화

서길헌(조형예술학박사)

작가 이상복은 어릴 때부터 무한히 펼쳐진 하늘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그러한 흥미와 호기심으로 그녀는 때로 천문대를 찾아가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머나먼 천체의 별들을 자세히 관찰하기도 하며 우주에 관한 관심의 끈을 줄기차게 이어왔다. 그렇게 그녀를 매혹했던 ‘커다란 우주’의 무한 공간은 작가로서의 그녀의 그림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와 각각의 구체적인 ‘작은 우주’로 형상화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우주에 대한 수많은 의문으로 대학 때는 잠시 서양철학에 관심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결국 서구의 합리적인 세계관보다 동양철학의 근원적인 사고방식이 자신이 생각하고 꿈꾸며 접해온 우주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에 바탕을 둔 그림 작업에 매진해왔다.

자신을 둘러싸고 무한히 펼쳐진 우주와의 만남은 젊을 때부터 그녀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성찰의 하나로서 그림을 통해 자아의 근원에 이르는 빛으로서 제시되었다. 이 빛을 따라 우주는 다양한 관계를 낳는 만남의 통로로 다가왔고, 만남은 각자의 요소를 서로 나누고 공유하여 세계를 상호작용으로 얽히고설킨 하나의 거대한 우주로 보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는 ‘나’라는 그녀 자신의 자아 또한 커다란 전체를 구성하는 소우주의 하나로 포함되어 참가하고 있다. 따라서 우주는 이미 ‘나’와 하나였다. 이러한 각성은 그녀가 화가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며 살아오는 가운데 스스로 터득하고 공감해온 동양사상의 요체이기도 하고, 초기 작업에서부터 외국에 나가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그림의 강한 동기가 되었으며 이후로도 그녀의 모든 작품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우주의 생명력을 성찰하는 주제가 되어주었다.

세계를 바라보는 이러한 성찰적 주제는 이상복의 작품에 다양한 특성의 여러 재료를 통해 개별적인 성격을 가진 개체들의 밀집과 분산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무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기 서로 다른 점처럼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다양한 관계들로 이루어지는 우주를 구현하는 그녀의 그림에 나타나는 원형적 형질 세포들끼리의 연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무수한 선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서로 연결해 생기를 불어넣는 생명줄의 역할을 한다. 생명줄은 화면에 분포된 각각 크고 작은 독립된 개체들을 하나의 세계로 이어주어 화면을 빈틈없는 관계들로 짜인 장엄한 우주의 은하처럼 모든 요소가 따로 부유하면서도 하나의 덩어리로 응집된 채 움직이게 한다. 거기에 보석같이 빛나며 살아 숨 쉬는 응결체들을 작가는 아름다운 ‘꽃’이나 ‘별’로 상징한다. 다양한 조형요소들의 유기적인 어울림 속에서 각각 하나의 점이자 뚜렷한 생명체로서의 소우주인 꽃이나 별들은 커다란 우주 안에서 또 다른 풍부한 세계를 품고 있는 서로 다른 우주들과 끊임없이 각자의 생명력을 주고받는다. 화면의 바탕은 낱낱이 겹쳐진 점들의 밀도 있는 집합으로 이루어져, 재료의 질감이 종합적으로 긴밀하게 엮이는 표현을 통해 우주 안의 모든 원소끼리의 통섭적인 결속으로 구체화한다.

작가가 캔버스와 함께 바탕으로 주로 사용하는 한지는 촘촘하고 질기게 엉킨 미세한 섬유질의 구조를 통해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유기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재료는 모든 질료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살아있는 물성을 통해 각자의 요소를 서로 주고받는다. 닥나무 껍질에서 얻은 한지의 식물성 섬유조직은 스스로 호흡하는 생명력으로 수성 아크릴 물감들을 속속들이 받아들여 색의 효과들이 표면에만 피상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화면의 안으로 깊이 스며들게 한다. 이렇듯 그녀는 한지를 통해 모세관과 같은 가느다란 선을 따라 재료들끼리 서로 심도 있게 삼투하는 식물적 특성을 수용하여 화면을 끊임없이 생장을 지속하는 생태학적 우주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그녀가 구성하는 화면은 이러한 재료의 질감이 밖으로 드러내는 올록볼록한 줄기들로 조밀하게 짜인 밀도 있고 촉각적인 표면을 구축하는데, 한지가 구현하는 이러한 질감들은 이상복의 작업을 단순히 개념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숨 쉬는’ 생명력을 가진 우주 자체로서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또 하나의 개별적인 우주로 만든다. 또한, 아크릴의 미디움에 커피 분말이나 반짝이 가루, 또는 미세한 모래 등을 적당히 섞어 넣어 평면 공간에 더욱 깊이 있는 시각적 차원을 부여한 화면은 갖가지 형상과 표정의 행성들이 생명체로 떠 있는 그림의 공간을 입체적이면서도 더욱 복합적인 은하로 보이게 한다. 그래서 그녀의 화면은 초신성들이 이루는 저 깊고 먼 은하계의 근원으로부터 발산하는 듯한 빛으로 가득 찬 대우주가 된다. 이러한 과정은 모두 작가가 어릴 때부터 빠져들었던 먼 우주와의 새로운 만남을 지속하는 일이며, 홀로 고립된 자아의 테두리를 벗어나 진정한 자아와 우주의 생명력을 찾아 근원에 이르고자 하는 작업이다. 삶을 통해 한결같이 이어온 그녀의 작업은 작가의 자아와 우주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의 여정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2021년 10월 22일

‘나’는 ‘생명줄로 연결된 우리들’

이상복 화백의 작품세계

시인은 글로 말하고 음악가는 노래로 말한다.

그렇다면 미술가는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 무엇인가? 생각을 나타내는 수단 아닌가!

그래서 화가(畵家)는 생각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사람이다.

정제된 소재와 독창적인 기법으로 그의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씩 그려내기 때문에 미술 작품에는 작가의 혼신의 땀이 베이게 되므로 작품으로부터 작가의 사유, 고뇌를 읽어내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화가는 ‘무엇을 그릴까?’에 대한 일종의 소명감으로 ‘주제’를 선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를 사로잡은 관심사, 의식 세계, 작가가 추구하는 가치의 이해를 위해서는 그림의 주제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된다.

평생 부모의 뜻을 거스른 것이 셋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교사가 되기를 원하셨던 부모의 뜻에 반하여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이 화백은 어려서부터 현상의 이면에서 현상을 좌우하는 그 ‘무엇’에 대해 유독 관심이 많았다고 회상한다. 그림을 그려도 단순한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만물이 생겨나는 바탕을 그려내고 싶은 열정으로 인해 탄생한 데뷔작의 주제가 ‘만남’이었다.

귀여운 아기의 탄생에는 청춘 남녀의 ‘만남’이 있어야 하고 천지만물의 탄생에는 반드시 하늘과 땅의 ‘만남’이 있어야 하듯 세상 어느 것 하나 이 ‘만남’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만남’은 단순히 하나의 현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반드시 생산을 수반하는 유기적 개념이다. 돌이켜보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의 필요조건이 이 ‘만남’이고 그 궁극적 바탕에 ‘하늘과 땅’이 있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영원한 천지만물의 만남을 표현하고자 해서 탄생한 작품이 ‘만남’이므로 이 작품은 이상복 화백의 화풍을 짐작케하는 상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등장하는 ‘가족’, ‘천지창조’ 등의 탄생은 ‘만남’이 수반하는 자연스러운 진행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현상으로부터 본질을 찾는 것, 나로부터 우주를 찾는 것,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래서 ‘나’로부터 시작한 사유는 바르고 깊어질수록 궁극적 본질인 우주를 향하여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마침내 생각이 ‘우주’에 이르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창조주 안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 화백의 작품들에게서는 이러한 인식이 작품의 주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의 작품 주제들을 보면 ‘만남’ ‘가족’, ‘천지창조’ 등 비교적 초기의 주제들을 비롯해서 ‘하늘과 땅과 만물(천지인)’, ‘하늘과 땅’, ‘우주’, ‘생명의 관계’, ‘사랑의 신비’, ‘존재의 창조’, ‘탄생’ 등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는 것이 없다.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깨달음이 없이는 도달이 불가능한 영역의 이야기들이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천지창조 1,2,3,4,5,6은 그 주제가 ‘하늘과 땅’ 즉 ‘음양’이며 ‘천지인’ 즉 ‘하늘과 땅과 만물’이다. ‘음양’, ‘천지인’이 무엇인가? 동양철학의 기본요소가 아닌가!

그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ㅇ,ㅁ,△,一, • 등의 기호는 바로 동양적 철학의 기본요소와 맥을 같이하는데, 철학이든 깨달음이든 진리에 입각해있다면 결국에 한 점에서 만나는 것은 당연하므로 그의 작품에서 이들 기호들이 일관되게 발견되는 것은 그의 사유가 바른 도(道)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복 화백에게 있어서 ‘ • ’은 자신이면서 우주다. 하늘이다. 자신과 우주가 이처럼 하나의 점으로 표시되는 것은 이 둘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생명줄로 연결된 우리들’인 것이다.

그가 깨달은 ‘나’의 정체는 ‘우리’이고 우리의 정체성은 ‘ • ’이었다.

단순할수록 상징의미는 크고 범위는 넓은 법이다. 마침내 그가 찾고 추구하는 ‘ • ’은 우주적인 바탕을 의미한다. 우주적이란 자전과 공전의 의미로, 스스로 독자적이면서 반드시 어딘가에 예속되어 있는 그래서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면서도 전부이고 전부이면서 개체인 공동체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주제들 즉 ‘색즉시공’, ‘사랑’, ‘영혼’, ‘우주’, ‘인연’, ‘인드라망’, ‘천라지망’ 등은 바로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오묘한 우주적 공동체적 관계들을 설명하는 고유한 언어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것은 외국에서였다.

미국 워싱턴D.C. 초대개인전을 비롯하여 파리 살롱 그랑에젠 도쥬르듸, 터키 컨템포러리 이스탄불 아트페어, 워싱턴한인미술가협회전 등에 참가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또한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상 및 한중문화교류상, 한국미협이사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화풍(畫風)

홍익대 서양화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과를 수업한 이상복 화백의 화풍은 그래서 당연히 서양적이다.

서양이란 동양의 상대적 개념으로, 동양적 성향이 선험적, 공동체적, 직관적이라면 서양은 경험론, 개인주의, 과학을 중시한다.

서양화는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리려하기 때문에 형태, 색채, 광택, 명암, 거리 등을 중시하며 유화(油畫) 물감을 이용해서 화면에 덧바르거나 깍아내는 방식으로 세세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상복 화백은 서양화의 기법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양적인 소재와의 접목을 시도했다. 보이는 현상 너머 본질에 대한 인식을 담아내기 위해 주로 사용하던 유화의 풍부한 색감 대신 한지, 닥종이, 붓, 돌가루, 흙, 먹 등 동양적인 소재들을 서양화에 적용하는 기법으로 자신의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해낸 것이다.

한지가 무엇인가? 가냘픈 닥나무 한 가닥이지만 수천 년에 걸쳐 한 시대를 풍미할만한 빼어난 시인 묵객들의 애환까지도 모두 담아낸, 수명이 천년에 이르는 오래고 큰 그릇 아닌가!

한지를 캔버스에 붙이거나 한지 위에 직접 작업을 하고, 동양화 붓에 유화물감을 사용해 동양화 같은 서양화 느낌을 내기도 하고 동양화 물감, 수채화 물감, 먹, 아크릴, 아교 등 각종 재료를 혼합하여 고풍스러운 색감을 표현했다.

2015년 작 Heaven and Earth(mixed media on Korean paper,62×80cm)는 한지를 물에 적신 다음 손으로 비벼서 여러 개의 섬유 가닥이 겹쳐진 것과 같은 효과 위에 채색한 작품이다.

색을 덧씌우는 서양화의 방식이 아닌 탈색을 통한 색 입히기 방식의 시도도 그를 키워낸, 소위 ‘비워서 하나 되는’ 동양적 사고의 경향에서 비롯된다.

‘동양적 사유방식에 익숙한 서양화가’, ‘붓으로 유화물감을 사용해 동양화적 서양화의 색채를 풍기는 작품’ 등의 평가는 빼어난 영감을 가진 이상복 화백의 사색의 깊이와 동서양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기법의 뛰어남을 말해준다.

 

의식의 크기는 책임감의 크기

우리 눈은 너무 작은 것은 작아서 보지 못하고 너무 큰 것은 또 커서 보지 못한다. 너무 작은 것은 작아서 볼 수가 없고 또 너무 큰 것은 또 커서 볼 수가 없을 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유무를 말하는 것은 아마추어리즘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므로 프로는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또 프로는 알고 모르고를 구분하지 않는다.

‘부분 속에 전체가 담겨있고 전체 속에 부분이 내포되어 있다’라는 인드라망적 사고로 보기 때문이다.

다만 부분이면서 전체이고 전체이면서 부분인 우주적 특성을 작은 화폭에 담아내려면 자연 상징을 이용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추상성이 풍부한 이상복 화백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그린다. 아는 것을 그리고 느껴지는 것을 그리고 깨달음을 그린다.

그림은 그리는 것이고 그리는 것이어서 글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또 글이기도 하다. ‘으’이기도 하고 ‘오’이기도 하고 ○□△의 도형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에서 고대 문명의 창시자들이 고안했던 기호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고대 문명의 창시자들이 보았던 세계에 21세기 동양의 서양화가 이상복 화백이 그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그가 표현하려는 세계가 결국 그러한 것이므로 이러한 귀결은 자연스러운 성장이고 발전이다.

그가 이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의 의식의 크기에서 샘솟는 책임감 때문이다.

의식의 크기는 책임감으로 표현되므로 책임감의 크기로 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면 이상복 화백의 화가로서의 책임감은 우주적이다. 모두에게 익숙한 ‘하늘’이다. ‘공동체’다. ‘하나됨’이다. ‘유기체’다.

개체와 전체가 유리될 수 없는 본연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 또한 우리 몸의 신경 뉴런처럼 어딘가에 무언가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비록 엉성해 보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빠져나갈 수 없는 인드라망이다. 천라지망이다. 서로를 연결하는 인연, 인과의 끈이다.

2016년 작 ‘Relation of Life(mixed media on Korean paper, 120×150cm)’에서 실선으로 표시된 작은 연결들이 2018년 작 ‘Relation of Life(acrylic on Korean paper, 60×73cm)’와 ‘Relation of Life(acrylic on Korean paper, 73×92cm)’에서는 좀더 굵고 뚜렷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회복해야 할 생명줄’로써 인드라망 세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더욱 뚜렷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제의 그가 아니고 내일의 그가 다를 것이므로 그의 그림은 계속 변할 것이다.

의식이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그의 작품 또한 넓어지고 뚜렷해질 것이다.

이상복 화백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싯귀가 회자되는 것은 이 글의 공감성 때문이다. 비좁은 절벽 바위틈 겨우 뿌리내린 뒤틀린 나무에 눈길이 가는 것 또한 그의 치열한 삶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어진 재능과 역량만큼 세상을 보고 이해하며 이해한 수준만큼의 삶을 살아간다면 큰 공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많은 화가들이 다양하고 많은 그림을 그리지만, 그만의 고뇌가 담겨있지 않는다면 큰 감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있을 법한 무언가를 찾아 고행하는 수행자들처럼 더 많은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든 화가 스스로에 대한 채찍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더 치열하게 자기 삶을 보듬고 사색하고 고뇌하며 추구하는 사람의 삶이 더 크고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복 화백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그는 사색하고 고뇌하고 깨달은 만큼의 새로운 세계를 소쩍새 피울음 토하듯 화폭에 담아낼 것이고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울릴만한 큰 감동과 작품에 담긴 땀의 의미를 알아챌 것이다.

趙玉九 교수(원시 상형문 연구가)

2021-5-10